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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johnpark_binter 2016. 9. 20. 23:29

할아버지는 작은 아버지들에게는 무척 엄한 분이셨다.

그러나 손주들에게는 예외이셨다.

그 무뚝뚝한 분이 방학이 되어 시골을 찾은 손자에게 보인 따뜻한 행동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연과 썰매이다.


겨울철 주된 놀이 중의 하나인 연날리기는 시골아이들에게는 일상의 유희였고 실력 또한 걸출했다.

연날리기에 서툰 나는 연싸움에서 매번 초장에 연줄이 끊어지는 절망을 맛보았다.

괜한 투정을 할머니에게 부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아무말없이 사기그릇 조각을 쇠절구에 빻고는 가시나무 작업할때만 쓰는 두꺼운 가죽장갑을 끼고 연줄에 풀과 함께 버무린 사기가루를 발라 주셨다.

징징거리는 내게 위로의 말 대신 얼레를 쥐어 주시며 다시 나가서 싸워보라고 하셨다.

다른 아이들이 나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그러나 나처럼 자상한 할아버지가 없는 그 아이들은 끊어진 연을 찾으러 밑둥만 남은 황량한 논을 종횡으로 뛰어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새삼 회상해 보니 고마운 할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어진다.


최신식 썰매에 대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중에 하나이다.

그 당시 나는 썰매도 왜 그리 못탔는지 모르겠다.

빙판으로 만들어 놓은 논에서 썰매타기 시합을 하면 속도가 느려 뒤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얼음 위로 듬성 듬성 튀어나온 벼 밑둥의 조각에 걸려 자빠지기 일쑤였다.

서툰 대장장이 연장만 나무란다는 말처럼 썰매 탓을 하면서 썰매를 안타겠노라고 투정을 부렸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무말 없이 뒤뜰쪽 창호문 구석에 걸려 있던 낡은 스케이트를 꺼내 오셨다.

셋째 작은아버지가 예전에 쓰시던 스케이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녹슨 연장으로 스케이트 날과 신발을 분리하셨다.

무엇을 하는 중이냐고 물어도 스쳐가는 미소만 지을 뿐 댓구는 없으셨다.

썰매에 스케이트 날을 못질할 때서야 우리는 감탄사를 더 이상 입에 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첨단의 발명품이 탄생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썰매는 굵은 철사를 날로 사용하고 있었고 특별한 썰매만 "ㄱ"자 철판을 날로 사용하는 것이 한 두대 있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기존의 철사 썰매는 출발이 늦은 것은 물론이고 달리다가 세우거나 방향을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썰매를 옆으로 틀면 쭉쭉 미끄러지는 모습이 마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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